IT

책 읽읍시다, 21년차 판사가 보증하는 AI 생존전략

[서평] 박주영 판사의 신간 <죄와 책>, 그가 탐독한 책들 그리고 사건 행간마다 놓인 '인간에 대한 이해'

AI(인공지능)의 고도화로 인해 '자동화'될 직업은 몇 개나 될까요. 정답은 없지만 추정치는 있습니다. 골드만삭스 리서치는 지난 3월 "3억 개의 일자리가 AI에 의해 자동화될 것"이라며 "AI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는 데 10년이 걸릴 것이며, 근로자의 6~7%가 직업을 잃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 질문. '판사'는 AI로 대체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AI에게 물어봤습니다. AI의 답을 요약해 전합니다.

"EU AI Act(인공지능법)는 사법 분야 AI에 대해 아주 명시적으로 이렇게 규정합니다.

'AI는 판사의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지만 대체해서는 안 되며, 최종 결정은 인간이 내려야 한다.' (EU 인공지능법 전문의 고려사항 제61항)

유럽평의회 산하 유럽사법효율위원회(CEPEJ, European Commission for the Efficiency of Justice)가 2025년 내놓은 생성형 AI 법원 가이드라인은 더 직접적입니다. AI를 엄격히 보조적 기능에 한정하고, 사법결정의 완전 자동화를 금지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AI가 변호사·회계사·사무직 등 전문직 노동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은 넘쳐나는데, 정작 사회가 AI에게 '최종 판단권'을 넘기는 데 가장 강하게 선을 긋는 직업 중 하나가 판사라는 겁니다. 문제는 기술적 능력만이 아니라 '사람을 처벌하고 권리를 박탈하는 판단에 누가 책임질 것인가'이기 때문이죠."

재판정에서 죄의 유무를 결정하고 형량을 선고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건, 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법칙'처럼 사회 내에 존재할 거라는 얘기죠. 이 같은 결론은 박주영 부장판사의 새 책 <죄와 책>(모로)을 읽으며 느낀 감상과 상통합니다. 독자 혹은 재판을 취재하는 기자 혹은 시민으로서, 이 책은 '판결은 왜 인간이 내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350페이지짜리 설명서로 읽혔습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송신기라면, 판사는 수신기다. 피고인과 변호사가 엄청난 비트가 담긴 소리를 전송했는데 판사가 모르스 부호 정도의 정보만 수신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판사는 수신자이자 판단자다. 번역물의 행간과 통역된 말의 맥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법률가는, 컨버터로서의 배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함량 미달의 검사와 변호사, 판사가 주관하는 재판은 부조리의 극치다.(p86~p87)

'인간을 이해하는 수신기'로서의 재판. 2006년 판사 생활을 시작한 박 판사가 그려내려 한 재판정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2024년 1월 24일, 부산지법 동부지원. 전세 사기 사건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담당 판사가 박 판사였습니다. 피고인은 2020년부터 3년간 부산 인근 건물 296세대를 매입해 임대 사업을 했는데요. 임차인 229명에게 전세 보증금 180억 원을 돌려주지 못해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박 판사의 시선은 피해자에게 닿았습니다.

재판 시작 때부터 계속 신경 썼던 건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끊임없이 탄원서를 제출하고 빠짐없이 법정을 찾는 피해자들의 안위였다. 망가진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한 기성세대인 내가 피해자들을 위로해도 되는 걸까.

나의 의문 섞인 망설임은 '제가 아무리 탄원서를 많이 써서 낸다고 한들 일개 개인이 쓴 한 장의 탄원서가 공판의 결과나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겠죠'로 시작하는 피해자의 탄원서를 읽은 후에 해소됐다. 피해자의 이 말만큼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결심했다." (188p~189p)

증명을 위해, 박 판사는 피해자들 탄원서 수백 장을 모두 읽고 요약했고 한 명 한 명의 주장을 판결문에 담았습니다. 피고인에게 15년 형을 선고한 박 판사는 선고가 끝난 뒤 피해자들을 불러세웠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관련 기사 : [전문] 피해자들이 눈물 흘린 '전세사기 법정 최고형' 판결문).

"조심스럽게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시오."

"비관하고, 자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고자 합니다"라며 탄원서를 눌러썼던 피해자를 향한 그의 답신이었습니다.

그 어떤 AI가 이런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요. 탄원서를 빠짐없이 읽어보고 판결문에 담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성세대의 잘못'을 자백할 수 있을까요. 재판은, 판결은, 인간에게 끝까지 남아야 할 영역이 맞습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추모 행진에서 "전세사기 피해,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피켓을 높이 들고 있다.

"'보증'에 경기 일으키는 법률가가 '보증'하는, 독서의 효능"

그렇기에 박 판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력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독서'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사실 이 책은 "20년 남짓 되는 법관 생활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겪은 재판 사례들과 그와 연관된 책을 골라 소개하는 책"(책 소개 글)입니다. <죄와 책>에는 스무 권가량의 책이 등장합니다. 모두 각각의 사건 속에 책 내용이 녹여 있지만, 모이는 결론은 어쩌면 같습니다.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사람에 대한 깊고 푸른 이해다. 법률가에게 문학적 시선과 감각이 없으면, 추상적 규범과 문장의 행간에 갇힌 인간을 절대 감지할 수 없다. (9p)

한때 전업 작가를 꿈꿨다는 박 판사는 '나만의 문학 하는 방식을 찾았다'라며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돌아보면, 문학은 나를 전업 작가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나와 재판과 판결문에 미세한 온기를 더했다. 사실 한 꼬집도 안 되는 재주를 가진 전업 작가보다, 책 많이 읽고 문학적 상상력을 가진 전업 판사가, 직업 정치인이, 경제 관료가, 과학자가, 교사가, 프로 야구 선수가 훨씬 더 세상에 필요하지 않을까, 자위해 본다. (11p)

이 책의 결론은 그래서 '책을 읽읍시다'이기도 합니다.

보증이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법률가인 내가, 독서의 효능만큼은 자신 있게 보증한다. 생존을 위해서도 독서는 절대적이다. 인공지능에 맞설 방도는 독서 말고는 없다. 오직 책 읽는 인간만이 살아남아 인공지능과 겨룰 수 있을 것이다. (10p)

독서는 모든 직업군에 권하는 '판사'의 보증이 담긴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