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증오·팬덤·적통 논쟁…‘막장 전대’ 뒤엔 86정치가 있다

7월 23일 당시 김민석(왼쪽)·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생외면 입법방해 국민의힘 규탄대회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스1
7월 23일 당시 김민석(왼쪽)·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생외면 입법방해 국민의힘 규탄대회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스1

[Special Report | 김민석 시대, 이재명의 미래] 민주당 전당대회가 드러낸 한국 정치의 민낯

● ‘막장 드라마’ 평가받은 전대…‘86퇴장론’ 다시 불붙어

● 타도·선악 이분법·도덕적 우월감…86정치 한계의 근원

● 민주화 주역에서 기득권으로…‘도덕적 면허’에 빠져

● 86정치 30년 권력…‘무능 야당’ 향한 국민 불신이 심판 막아

● 인위적 종식 외엔 답 없어, 보수 빨리 정신 차려야

7월 23일 당시 김민석(왼쪽)·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생외면 입법방해 국민의힘 규탄대회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살벌한 난타전을 벌인 더불어민주당 8·17전국당원대회가 김민석 의원의 당대표 취임으로 끝났다. 정책과 혁신 경쟁은 없었다. 비록 정청래 의원은 졌지만 최민희 의원 등 정청래계가 3명이나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향후 주요 국면마다 극심한 갈등이 예견된다. 경쟁 후보에 대한 당 윤리위원회 제소 협박, ‘박쥐’라는 인격 모독 발언 등 극심한 네거티브 공세로 인해 언론에서도 ‘막장 드라마’란 표현까지 나왔다. 가장 보기 불편했던 건 조선시대 예송 논쟁을 방불케 했던 민생과 무관한 시대착오적 ‘적통 논쟁’이었다. 정청래는 ‘노무현 적통’을, 김민석은 ‘김대중 적자’를 내세웠다. 막장 싸움에 지지자까지 가세하며 대한민국 집권 여당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적통’ 싸움에 빠진 민주당…‘86퇴장론’ 다시 불붙어

피 튀기는 막장 대결 속에 ‘신스틸러’가 등장했다. 예비경선에서 ‘686 세대교체론’을 들고나온 김보미 전 강진군의회 의장이다. 그는 본선에 오른 86세대 후보 3인보다 더 주목받았다. 37세 청년 정치인 김보미는 86세대 당대표 후보들 면전에서 “인공지능(AI) 시대 구태한 적통 논쟁이나 벌이며 낡은 기득권 정치에 함몰돼 있는, 화염병과 짱돌을 들고 싸우던 686세대는 퇴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연설이 파란을 일으킨 건 공감대가 컸기 때문이다. 2016년 20대 총선을 기점으로 선거 때마다 제기된 ‘86퇴출론’이 또다시 제기된 배경에는 86 정치인들이 여전히 당의 중심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민주당의 현실이 있다.

당대표를 비롯해 최고위원까지 장악한 86정치인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유입된 건 2000년 16대 총선 때다. ‘3김 정치 극복’과 ‘젊은 피 수혈론’을 배경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인영·임종석·오영식 같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 운동권을 대거 영입한 것이다. 한나라당도 이에 질세라 원희룡·정태근·김영춘 같은 학생운동권 출신을 영입하며 맞불을 놓았다. 민주당 측은 김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전대협 중심의 이른바 ‘비판적 지지파’인 데 반해, 한나라당 측은 비주사파 중심의 학생운동 86세대였다. 뒤이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86세대 운동권 정치인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보수에서는 원희룡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사라졌지만, 민주당에서는 여전히 당의 주축이라는 점이다.

“한때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각기 역할을 이루려고 했는데, 저항의 시대를 넘어서고 소위 이제 건설의 시대로 가니까 바닥이 보이고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쪽의 동질감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착한 사람이고 뭔가 미래를 위해서 기여한 것처럼 하는 그런 분위기가 지금도 여전한 것이 현실이에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고집 ‘진보의 미래’에서 집권 내내 딴지를 걸던 진보세력을 향해 내놓은 항변인데, 그가 직접 등용했던 86세대 정치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민주화라는 ‘저항의 시대’에는 강했지만 ‘건설의 시대’에는 취약했던 86세대는 끝내 자신들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했다. 통합과 미래 성장이라는 시대정신보다 과거의 신념과 진영 논리에 매달리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86정치’의 문제는 한국 정치를 규정해 온 본질적 문제이기도 하다. 한 세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고 다음 세대가 나아갈 길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그 경험이 현실을 해석하는 자산이 아니라 현실을 가두는 틀이 될 때다.

특정한 경험과 의식을 공유하는 세력이 한 집단을 장기간 지배하면 사고는 획일화되기 쉽다. 같은 목소리만 되풀이되는 ‘에코체임버’ 속에서 이견과 비판이 묵살되며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른바 집단극화 현상이다. ‘검수완박’이라는 잘못된 확신에 매몰돼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붙인 민주당의 극단성은 86정치에 포획된 정당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86세대 정치인들이 벌인 적통 논쟁과 막장극 역시 86정치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혐오에 기반한 팬덤 정치, 증오를 앞세운 극단적 진영 정치, 국민의 뜻을 빙자한 포퓰리즘, 모든 걸 삼켜버리는 친일몰이 등 지금 한국 정치 전반을 왜곡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86정치의 산물이 아닐까. 특정 세력에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근원은 따져봐야 한다.

타도·선악 이분법·도덕적 우월감…86정치 한계의 근원

86정치가 지닌 한계의 근원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정치를 사회변혁의 도구로 여기는 ‘운동 정치’다. 시대착오적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을 대안으로 받아들였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86세대는 독재에 맞서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몸에 밴 ‘타도해서 쟁취하는’ 방식을 정치 영역으로 그대로 옮겨왔는데 이른바 ‘정치의 운동화’다. 문제는 운동의 문법은 대화와 타협을 본질로 하는 정치 문법과 충돌한다는 데 있다. 상대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됐고, 진영화와 정치 양극화 역시 심화했다. 광우병 사태와 사드 배치,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방류 반대 등의 반미·반일 선동이 수시로 일어나는 것도 학창 시절의 의식이 깊게 자리 잡은 탓이다. 여기에 시민운동 영역에 진출한 86세대까지 결합하며 이른바 촛불 정치로 발전하며 86정치가 장기간 영향력을 유지하는 기반이 됐다.

둘째, ‘내 편이 아니면 악(惡)’으로 규정하는 ‘교조적 선악 이분법’이다. 86정치는 보수를 ‘친일·군부독재 후예’로 규정하며 정치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86세대 대부 격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정조대왕 이후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을 제외하고 모두 독재와 극우가 통치했다며 ‘노론 200년 집권론’을 주장했다. 이는 86정치인의 기본적 의식구조라 봐도 무방하다. 보수와 타협은 부도덕하며, 정의로운 자신들이 장기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인식이다. 교조적 선악 이분법은 모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잘못에 관대하게 만든다. 사소한 부조리 따위는 ‘거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로 여기는 것이다. 한명숙·곽노현·조국 사태 때 보여준 86세대의 ‘내로남불’은 그 단면이다.

셋째, ‘도덕적 우월감’이다. 청년기의 경험은 일생에 걸쳐 특정한 의식과 감수성, 정치적 태도를 규정한다. 새가 태어난 뒤 처음 본 생명체를 어미로 여기는 ‘정초 의식’과도 비슷하다. 건국 세대에게 강한 국가주의와 반공 의식이, 산업화 세대에게 출세주의와 경쟁의식이 내재됐지만, 각각 나라를 세우고 가난을 극복했다는 성취감과 자긍심도 있다. 민주화 세대 역시 평등주의와 저항 의식이 강한 동시에, 자신의 희생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품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이 과거의 희생을 근거로 현재의 부조리에 관대해지는 일종의 ‘도덕적 면허 효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인간 내면에는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이기심이 있기에 견제가 무너지면 언제든 사적 욕망이 드러날 수 있다.

상대를 악마화하며 강한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집권한 권력은 쉽게 자가당착에 빠진다. 대의명분과 주자학적 질서를 내세워 훈구 세력을 공격한 뒤 기득권을 누렸던 조선의 사림 세력처럼, 변혁을 표방한 신진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 또 다른 특권층으로 변질된 사례는 역사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소련의 노멘클라투라, 중국공산당의 태자당(太子黨), 북한의 백두혈통이 그렇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신념에 반하는 상황이나 대상을 마주했을 때 더욱 격렬하게 배척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는 이러한 86세대의 도덕주의적 양면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2024년 11월 2일 이재명 당시 대표(맨 앞 왼쪽에서 네 번째)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서울 중구 서울역 인근에서 열린 ‘김건희 국정농단 범국민 규탄대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뉴스1

86정치 30년 권력…‘무능 야당’ 향한 국민 불신이 심판 막아

86세대 정치인은 민주화운동 당시의 ‘희생’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에서 유사한 경험과 응집된 정체성을 공유하는 특정 세대가 이처럼 대규모로 조직화한 경우는 세계적으로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체제 지식인과 민중 연합 세력이 86세대처럼 광범위하게 결집한 사례 역시 브라질을 제외하면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교육과 언론, 종교, 시민사회, 문화계 전반에 진출한 86세대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에서 우위를 점하며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문제는 그렇게 쟁취한 헤게모니를 미래 준비가 아닌 기득권 유지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의 차기 대권도 86세대가 중심에 설 것이다.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는 민주당의 막장 전당대회를 보며 “정청래가 되면 망한다. 김민석이 되면 연말쯤 더 크게 망한다”며 그 이유를 “첫째, 당원들이 증오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대체할 증오의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2024년 비명횡사 공천의 후유증이다. 승자독식, 패자 멸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성 기자의 분석은 원인이 아닌 결과다. 86정치의 증오 정치, 배제 정치가 당원을 증오로 중독시켰고, 그런 당내 문화 속에서 비명횡사 공천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2012년 대선 패배 후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86퇴출론이 처음 제기된 2016년 총선 훨씬 전부터 자신들의 문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문 전 대통령이 말한 ‘자부심, 우월감, 싸가지 없음’은 86정치의 대표 키워드다. 원인을 알고도 성찰하기는커녕 편향성과 폐쇄성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물론 보수의 자멸로 견제 장치가 와해됐고, 도덕적 확신마저 고양한 측면을 무시할 순 없다. ‘적대적 공생관계’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86정치의 30년 장기 집권이 남긴 건 무엇일까. 증오와 배제의 편가르기, 지지자 동원의 팬덤 정치, 극단적 진영화, 헌정 질서 파괴, 86패권주의 같은 폐해는 선명한 반면 정작 크게 내세울 만한 정치적 성과가 없다. 김보미 전 의장이 제기한 공정, 민주주의, 청년, 미래, 세대교체를 외면하고 있는 민주당의 현실은 86정치의 결과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는 것”이라 했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른바 ‘악의 내면화’다. 젊은 시절 경험이 ‘악의 세력’에 대한 오도된 자기 확신을 만들었고, 이는 습관을 거쳐 상식으로 내면화됐다. 대법관 증원, 법왜곡죄, 4심제 같은 반헌법적 사법 시스템 개악과 국민 피해는 안중에도 없는 검찰 해체는 모두 그 결과다. 자신을 성찰하고 국민적 저항으로만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건만, 무능한 야당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86정치의 폐해는 결국 국민 심판에 의한 인위적 종식 외에 답이 없을 듯하다. 보수가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