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스물넷 딸 유류품에서 발견된 햇반, 졸업장 안고 정착한 한국에서 멈춘 꿈[아리셀 참사, 늦게 쓰는 부고]

▲어린 정정 씨의 모습. 이순희 님 제공
▲어린 정정 씨의 모습. 이순희 님 제공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2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이들은 누군가의 가족이며 이웃이며 친구였다. 그들의 삶이 단순한 숫자로 기억되는 일을 넘기 위해, 참사 2주기에서 3주기 사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삶을 기록한 부고를 전하려 한다.

고 엄정정 씨의 이름은 '고요할 정(靜)' 두 개를 겹쳐 쓴다. 중국에선 '깨끗하고 평안하다'는 뜻이다. 1999년 9월 28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이순희 씨 부부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주로 수도 베이징이 있는 허베이성에서 할아버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하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정정 씨가 세 살일 때 한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했던 장사, 식당이 계속 잘되지 않았다. 정정 씨는 여름·겨울 방학 때마다 한국 부모님 집을 들러 두어 달씩 같이 살았다. 그래도 떨어져 산 세월이 십수 년이니, 어머니는 아직도 "사랑을 더 많이 주지 못해서 원통하다"며 자주 운다고 지난 8일 말했다.

이 씨가 기억하는 정정 씨는 그림과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정정 씨는 학교에서도 틈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고 잘 그렸다. "학교 다닐 때 (행사 등) 벽보는 정정이가 다 그렸다"고 이 씨가 말했다. 추후 한국에 정착한 정정 씨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도 그림 공부였다. 당장 돈이 부족해 시작하진 못했지만, 정정 씨는 만화를 그리는 교육을 받고 싶어 했고 틈틈이 그린 만화를 엄마에게 보여줬다.

고 엄정정 씨는 2017년 열여덟의 나이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연변대학 사범학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정정 씨의 마음속엔 항상 그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2년, 대학 수료만 마쳐놓고 정정 씨는 한국에 들어왔다. '이제 가족과 같이 살고 싶다'며 한국에 정착하겠다고 밝혔다. 이 씨는 "졸업증을 따고 오라"며 단호하게 설득해 그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2024년 3월, 정정 씨는 대학교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을 따내고 한국에 입국했다. 정착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실습해 보니 아이들 가르치는 건 적성에 안 맞더라'고 부모님께 고백했다. 손재주가 좋은 정정 씨는 한국에서 틈틈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아이돌 연예인 카드도 만들어 팬들에게 팔았다. 집 책장엔 정정 씨가 남겨놓은 비즈나 리본 등 공예 도구들이 남아 있다. 정정 씨가 팔지 못한 머리핀도 함께 놓여 있다.

정정 씨가 '아리셀'에 입사한 건 입국한 지 한 달 반 가량됐을 무렵인 4월 말이다. 중국에서 입이 마르게 "내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딸이, 한국에서도 "나도 보탬이 될게"라며 일을 시작했다. 정정 씨는 절약이 몸에 배여 있었다. 부모로선 철이 너무 빨리 든 딸이었다. 대학교 때도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패딩 점퍼 하나를 사도, 10년 넘게 입고도 불평 한 번 없었던 딸"이었다.

아리셀에서 일한 지 두 달이 됐을 무렵, 정정 씨는 참사로 사망했다. 향년 24세. 정정 씨의 유해는 온전치 못했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가 유실됐다. 참사 2년이 지났지만, 정부, 지자체 어디도 온전한 유해 수습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 씨는 "속이 시꺼멓게 애가 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씨가 기억하는 정정 씨의 마지막 순간은 통근버스에 타자마자 이 씨에게 '저녁 식사 문자'를 보내던 모습이다. 늘 정정 씨가 먼저 보낸 대화로 채워지던 카카오톡 대화방이었지만, 참사 당일에는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 대화방엔 그날 오후 이 씨가 보낸 다급한 확인 문자만 남아 있다. "딸 다니는 데도 화성이야? (사고 난 곳이) 배터리 공장이라는데? 넌 뭐 만든다 했지?"

이 씨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딸 정정 씨가 계약한 곳이다. 원래 네 식구는 경기 시흥시 정왕동 한 투룸 빌라에 모여 살았다. 정정 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여동생과 같은 방을 썼다. 그러다 정정 씨가 한국 정착 계획을 밝힌 후, 부부는 함께 건설 일을 나갔다. '방 3개짜리'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부부는 한 조가 돼 천장 시공을 했고, 주말도 없이 주 7일을 바짝 일했다. 남들이 하루에 한 집을 작업할 때, 둘은 두 집씩 해치웠다. 광명, 대전, 일산, 청주, 강릉, 일이 있으면 전국을 다녔다. 수입이 좋을 땐 한 사람당 한 달 1000만 원도 벌었다. 그렇게 1년 반 가량 일을 해 돈을 모았다. 아리셀 참사가 일어난 그날도 부부가 안양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새집 사자'고 노래를 불렀던 정정 씨는 동생과 함께 지금 집을 보러 다녔고, 그해 5월에 가계약도 직접 했다. 이후 8월 16일을 이사하기 좋은 길일로 받아 놓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 사이 정정 씨가 사망했다. 이 씨 부부가 아리셀 참사 현장과 화성시 모두누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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