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례가 뒤집혔다, 빚 못 갚을 권리가 생겼다 [세상에 이런 법이]

대법원 판례가 뒤집혔다. 빚 못 갚을 권리가 생겼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다. 변호사들이 민형사 사건 등 법 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 자화상을 담아낸다.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어느 날 대부업체에서 채권자라며 연락이 온다면? 이것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채권양도 제도를 통해 법적으로 가능한 현실이다. 채권양도란 원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채권을 제3자에게 넘긴다는 사실을 통지하는 방식으로 성립하는 법률행위다. 채무자 동의는 성립 요건이 아니다.
은행이 연체채권을 서둘러 처분하는 까닭이 있다. 3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을 보유하면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하고, 건전성 지표인 BIS 자기자본비율도 악화된다. 그래서 은행은 직접 추심에 나서는 대신 부실채권을 시장가의 50% 이상 할인한 가격에 매각한다. 처음에는 자산관리회사나 대형 대부업체가 채권을 사들이지만, 추심에 실패하거나 회수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면 채권은 다시 더 영세한 소규모 업자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은 반복될수록 채권은 점점 규제 사각지대로 흘러들어 불법추심의 표적이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금보험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공공기관조차 부실채권을 대부업체에 매각해왔다는 사실이다. 5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상록수제일차유동화전문유한회사’를 공개 비판했다. 2003년 카드대란 수습을 위해 설립된 이 특수목적법인이 23년이 지난 채권을 아직도 추심 중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처럼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소멸시효를 반복적으로 연장하며 살아남은 채권을 ‘좀비 채권’이라 부른다. 은행 대출이나 카드 채무의 소멸시효는 5년이지만, 채권자들은 5년이 다 되어갈 무렵마다 지급명령 신청이나 소송을 기계적으로 제기해 시효를 초기화한다. 여기에 더해, 이미 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부활’시키는 수법도 광범위하게 활용되어왔다.
채권자는 시효 완성 사실을 모르는 채무자에게 “조금만 갚으면 나머지 빚은 없애주겠다”라고 회유하고, 채무자가 일부라도 변제하는 순간 이를 ‘채무 승인’으로 처리해 나머지 전액을 청구하는 방식이다. 이는 대법원이 58년간 유지해온 시효이익 포기 추정 법리에게 근거한 것이다. 사실상 법원이 채권자 편에서 채권 부활을 용인해온 셈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5년 7월 24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 법리를 전격 변경했다. 새 판례는 채무자가 시효 완성 사실을 실제로 알고서 포기 의사를 표시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했다. 58년 만에 무게 추가 채무자 보호 쪽으로 기운 것이다.
판례 변경에 그치지 않고 입법도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법률이 특히 눈에 띈다. 2024년 1월 제정되어 같은 해 10월 17일 시행된 ‘개인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은 연체 이후의 모든 절차를 채권자 중심이 아니라, 채무자 보호와 채권 관리의 균형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정비했다.
2025년 1월 개정되어 7월부터 시행된 대부업법은 불법 사금융 척결을 겨냥한다. 연이율 60%를 초과하는 초고금리 계약, 성착취·인신매매·폭행·협박 등을 조건으로 한 반사회적 대부계약에 대해서는 원금과 이자 모두를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2025년 5월 29일 광주지방법원은 개정 대부업법을 근거로 연이율 1738~4171%에 달하는 초고금리 불법 대부계약에 대해 원금·이자 전액 반환을 명하는 첫 판결을 선고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시장 시절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라는 책의 추천사를 썼다. “빚은 잘 갚는 것이 중요합니다. 빚을 잘 갚는다는 것은 더 높은 이자의 다른 빚으로 갚거나 삶의 존엄을 포기하며 가혹하게 갚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빌린 돈을 잘 갚는다는 것은 형편에 맞게 잘 조절해서 갚는 것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갚아야 한다는 원칙과, 그 원칙을 명분으로 삼은 구조적 약탈을 구분하는 법적 기준이 비로소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입법을 넘어 대한민국 금융 문화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