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스쿼시 전직 국가대표 감독의 성착취, 10년 만에 폭로 나왔다

여성 선수 6명 피해 사례 28건 신고… 연맹 무관심 속에 방치된 고통
훈련 중인 스쿼시 선수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한겨레 자료
2015년 말 늦은 밤 인천 송도역 삼거리 앞 무한리필 고깃집 ‘공룡고기’ 입구. 스쿼시 선수 두 명은 이날 같은 현장을 목격했지만, 이를 10년 넘게 숨겼다. 이원기는 애써 고개를 숙인 채 화장실을 등지고 식당 입구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몸을 반쯤 숨긴 채 현장을 촬영하던 최유라는 이원기를 보고선 재빨리 휴대전화를 숨겼다. “하지 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2층 복도에 짧게 울려 퍼졌다. 이원기는 자신이 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라 믿고 살았다. 최유라는 이원기가 현장을 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 기억 속에 묻혔던 현장은 2026년 6월29일 대한스쿼시연맹에 신고서가 접수되면서 다시 살아났다. 보낸 이는 2014 인천·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스쿼시 단체전 동메달리스트인 양연수였다. 그날 밤 여자 화장실 앞에서 “하지 마요”라고 외쳤던 그는, 10년이 지나 선후배 여성 선수 6명과 함께 각자가 겪은 성착취 피해를 모아 연맹에 고발했다. 동료 선수 13명도 가해자의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원기와 최유라는 서로가 같은 현장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17년(2001~2017년)간 스쿼시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구륜회다. 2025년부터 연맹 최고위직인 사무처장을 지낸 구륜회는 연맹 인사위원회에 출석해 모든 가해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한때 제자였던 신고인 양연수를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한겨레21은 성착취 피해자와 목격자를 인터뷰하고, 연맹 인사위원회 회의록, 소명자료, 엄벌 탄원서 및 신고서를 입수해 스쿼시계 거물의 성착취 의혹을 추적했다.
신고서에 담긴 여성 선수 6명의 피해 사례(성착취, 폭언 및 폭행 등)는 모두 28건이다. 이 중 한겨레21이 복수의 목격자(이원기, 최유라)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사건은, 2015년 말 무한리필 고깃집 ‘공룡고기’에서 발생한 강제추행 의혹이다. 양연수는 신고서에 “화장실 앞 복도에서 구륜회와 마주쳤고, 제 가슴과 성기를 손으로 장난치듯 계속 쳤다. ‘하지 말라’고 거부했지만, 어깨동무하며 가슴을 다시 만지며 다리 사이에 손을 넣으려고 했다”고 적었다.
2026년 7월10일 연맹 인사위원회에 출석한 양연수는 “이원기와 최유라 선수가 목격자”라고 지목한 뒤 “(구륜회가) 겁을 줘 이원기 선수가 거짓 진술을 했는데 이를 구씨가 영상으로 촬영해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사위원회에는 이원기 선수가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가 제출됐는데, 여기에 “화장실을 나오는 도중에 구륜회 감독이 양연수양의 가슴과 다리 사이 중요 부위에 손을 대는 행동을 목격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사건 발생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이원기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그는 “양연수와 구륜회 감독과 나, 이렇게 셋이서 눈을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양연수 선수는 내게 우상과도 같았다. 구륜회 감독 역시 스쿼시계에서는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간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나를 불러내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앞섰다. 목격자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이원기는 사건 발생 뒤 구륜회 감독과 사무실에서 단둘이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그는 “구륜회가 인천 훈련장 사무실에서 수차례 불러 ‘내가 양연수를 성추행했냐, 언제 손을 넣었냐’라고 압박 수사하듯 다그쳤다. “아직 어리고 더 성공하고 싶었던” 그는 구륜회에게 “(성추행)하지 않으셨다”고 대답했다.
구륜회가 다그친 선수는 이원기만이 아니다. 대학을 막 졸업해 실업팀을 찾고 있던 최유라 역시 구륜회와 만났다. 최유라가 “식당 입구에서 휴대전화로 연수 언니를 찍었다”며 당시 최인수 연맹 사무처장을 통해 구륜회의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최유라는 “이전부터 연수 언니를 통해 구륜회가 술을 마시면 여자 선수 몸에 손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수 언니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는 순간 따라 일어나길래 느낌이 이상해 같이 따라 나갔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구륜회는 최유라를 사무실로 불러 ‘네가 불편했다면 안타깝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2025년 7월 연맹을 떠난 최인수는 37년 동안 사무처장직을 맡은, 스쿼시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2016년 초 당사자인 양연수로부터 직접 피해 사실을 들었다고 밝힌 그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당시 연수는 처벌보단 진심 어린 사과를 원했다. 구륜회로부터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라는 말을 들었고, 한참 뒤에 다시 물어보니 ‘문제없이 다 끝났다’고 보고받아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일 처리를 잘 못한 것을 후회하고 선수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상의 존재 여부를 묻는 말에는 “구륜회가 술 먹고 회식 끝나면 그런 짓을 많이 해 영상을 찍었다고 들었다. ‘내가 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영상을 끝내 보진 못했다”고 말했다.
양연수의 폭로를 입증할 유일한 객관적 증거인 영상은 연맹에 전달되지 못했다. 최유라의 부모가 딸이 국가대표 감독인 구륜회의 눈 밖에 날까봐 영상 공개를 만류했다고 한다. 최유라는 “부모님이 스쿼시 선수로서의 내 앞날이 다칠까 걱정돼 영상을 전달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사건 이듬해인 2016년에는 내가 국가대표가 돼야 하는 시점이었고, 당시 구륜회의 힘이 워낙 막강했다”고 털어놨다.
17년간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았고 인천시체육회 스쿼시팀 감독이기도 했던 구륜회의 입지와 영향력을 두고 몇몇 선수는 “독재자”라고 말했다. “구륜회에게 찍힌 선수는 스쿼시계에서 매장당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 국가대표 추천 선수 제도가 있었는데, 구 감독이 특정 선수를 추천할 권한이 있었다. 국가대표가 되느냐 마느냐가 그의 힘으로 정해지는 느낌이었다.” 최유라의 설명이다.
양연수의 피해를 목격하고도 끝내 눈감았던 이원기 역시 구륜회에게 밉보이면 안 되는 처지였다. 2014년 10월 포항에서 홀로 인천까지 ‘스쿼시 유학’을 감행했던 그에겐 태극마크가 목표였다. 그는 “구륜회에게 말 한번 잘못했다가 매장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지금까지 돈 들여 운동한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해 그냥 넘어가려 했다”고 고백했다.
이원기는 양연수가 피해를 외면한 자신에게 먼저 “괜찮다”며 다독였던 일화도 털어놨다. 양연수는 “만약 구륜회가 나를 만진 상황을 봤다고 하면 원기는 인천 훈련장에서 쫓겨나 유령처럼 왕따를 당해야 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원기의 상황을 알기에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양연수의 피해 사실을 끝내 외면한 과거를 후회한다. 이원기는 “생활체육지도자로 있기에 타격이 없을 순 없다. 그러나 2019년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의 폭로를 보고 많은 고민을 했다. 정작 나는 나서지 못했다”며 “그사이 피해자들이 먼저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힘을 내게 됐다. 나 또한 폭언과 폭행의 피해자였다”고 말했다. 최유라는 “지난날의 선택이 너무 아쉽고 후회된다”고 한탄했다.
인사위원회에 출석한 피해자들은 기괴한 성착취 방식을 세세하게 증언했다. “본인에게 뽀뽀 마사지를 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게임에 지면 뽀뽀를 시키고, 항상 마사지를 시켰다”(오성령), “(회식 장소로 가는 택시 안에서 뽀뽀를 강요해) 너무 하기 싫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협박한 적이 많아 몇 번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됐고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안은찬), “전국체전 기간 강제로 숙소에서 옷과 속옷을 벗게 하고 오일 마사지를 당했다. 안 받겠다고 하면 폭언이 돌아왔다”(이지현) 등 2000년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 피해 사례들이 쏟아졌다.
인사위원회에 출석한 구륜회는 모든 가해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민원인이 2016년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훈련하고, 회식과 행사에 참석하며, 사진을 촬영하고 생일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는지 검토를 요청한다”고 했다. 그는 양연수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생일 축하 메시지를 갈무리한 화면과 함께 회식할 때 찍은 사진 여러 장을 ‘소명 자료’로 연맹에 제출했다.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은 이광현 연맹 인사위원회 위원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이런 일이 발생한 데 있어, 분리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며 “민원인들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평가했다. 연맹은 7월10일 인사위원회에서 구륜회 사무처장의 3개월 직무정지 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외부 노무법인에 조사 업무를 위탁했다.
성인 대상 강제추행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스포츠계 비리를 조사할 권한이 있는 스포츠윤리센터는 사건을 접수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조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폭로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피해자들을 규합했던 현역 선수 양연수는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해서 피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혹과 피해가 제기된 사람이 연맹의 요직에서 활동하는 게 옳은지 묻고 싶다”며 “법이 처벌할 순 없더라도 이 사회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선수들이 두려움 없이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또 다른 현역 선수인 안은찬은 신고서에 “사무처장이라는 직위를 얻은 그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뒤로하고 스쿼시계를 쥐락펴락하는 걸 볼 수가 없다”고 적었다. 실명으로 폭로에 나선 이들은 “보복이 두려워 진술에 동참하지 못한 사례”가 추가로 드러나길 기대하고 있다.
구륜회는 제기된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민원인들은 그런 문제가 발생한 뒤에도 제 에스엔에스 게시글에 댓글을 달고, 함께 회식에 참석했다. 이 자체가 민원인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증거”라며 “2016년까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훈련하고 잘 지내다가 사무처장이 된 지 1년이 지나자 ‘사무처장에서 내려와라’는 식으로 요구하는데 뒤에서 뭔가 꾸미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라는 의심이 있다. 정말 문제가 있었다면 지난해 사무처장이 됐을 때 문제 삼았어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구륜회는 2015년 말 발생한 사건을 놓고, 이원기와 최유라를 만났으며 최인수 전 사무처장과 통화한 사실은 인정한다. 다만 그는 “최인수 처장과 통화하며 성추행이 아니라고 말했고, 최 처장도 문제 삼지 않아 해프닝으로 끝난 사안”이라며 “그래서 당시 연맹에 접수된 문서도 없었다”고 했다. 17년간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며 선수 선발에 관여했다는 의혹에는 “국가대표 선발과 관련해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경기력향상위원회에 의견을 낼 뿐 감독이 특정 선수를 넣을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연맹은 외부 조사 결과 보고서를 검토한 뒤, 이르면 2026년 10월 말 인사위원회를 열어 가해자로 지목된 구륜회의 처분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