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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 기업, 얼마나 나아졌을까… 대만 반도체·전기전자 노동자에게 물었다

정신과 의사 우이청 박사(푸른색 셔츠 입은 이)가 15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에 있는 신주시립마카이아동병원(마카이의료재단 소속)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신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
정신과 의사 우이청 박사(푸른색 셔츠 입은 이)가 15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에 있는 신주시립마카이아동병원(마카이의료재단 소속)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신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

[표지이야기]대만 반도체·전기전자 노동자 심층 설문조사… 우울·불안 66.7%, 수면장애 50%

정신과 의사 우이청 박사(푸른색 셔츠 입은 이)가 15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에 있는 신주시립마카이아동병원(마카이의료재단 소속)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신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과로의 섬’이라 불리는 대만이지만, 대만 노동부가 202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를 기반으로 밝힌 전일제 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주당 총노동시간’(2024년 기준)은 41.5시간으로 한국(43.8시간)이나 일본(42.9시간)에 견줘 오히려 낮다. 그런데도 반도체 엔지니어의 과로가 사회문제로 번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겨레21은 2026년 9월1일부터 17일까지 대만전기전자정보산업노동조합(대만전기노조)을 통해 반도체·전기전자 업종 종사자를 상대로 과로 현황을 묻는 익명의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에 응한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엔지니어 12명 등 총 30명의 노동자 가운데 86.7%(26명)가 ‘연장노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고, 73.3%(22명)가 ‘과로로 인한 건강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설문 결과를 받아본 노동·의료 전문가들은 한국의 반도체 연구개발직 ‘주 52시간 노동시간 적용 예외’ 시도를 놓고 “대만 반도체 산업의 현실을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직문화, “군대 같다” “상명하복 엄격”

대만 노동기준법 역시 한국과 같이 ‘하루 8시간·주 40시간’을 법정 노동시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연장노동을 포함해 하루 노동시간은 최대 12시간으로 제한된다. 다만 연장노동의 상한을 대만은 ‘1개월 단위’로, 한국은 ‘1주 단위’로 제한한다. 즉 대만은 원칙적으로 ‘월 연장노동 총합은 46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규정만 있을 뿐, 한국의 ‘주 52시간제’처럼 주 단위로 노동시간 총량을 규제하진 않는다. 얼핏 대만의 노동시간 규제가 좀더 유연해 보이겠지만, 1개월 최대 노동시간을 비교하면 한국(약 226시간)이 대만(약 220시간)보다 많다.

문제는 대만의 1개월 최대 노동시간이 한국보다 적음에도 과로 문화가 만연해 노동자의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이다. 응답자 30명 가운데 ‘주 40시간 미만’으로 일한다고 한 이는 13.3%(4명)에 그쳤다. ‘주 50시간 미만’으로 일한다는 노동자는 63.3%(19명), ‘주 60시간 미만’으로 일한다는 노동자는 23.3%(7명)였다.

특히 ‘과로로 건강 이상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73.3%(22명)에 달했다. 구체적인 증상(복수 응답)을 묻는 말에는 우울·불안 66.7%, 수면장애 50%, 심한 스트레스 43.3% 순으로 집계됐다. 15년 동안 신주에서 정신과 진료를 맡아온 마카이의과대학(마카이의료재단 소속) 우이청 교수(정신의학과)는 “반도체 기업은 수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는 곧바로 개인의 실적으로 이어진다”며 “실적에 따른 연봉 격차가 크다보니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과로의 원인(복수 응답)을 묻는 말에는 ‘인력 부족’과 ‘가혹하거나 고압적인 조직문화’가 가장 많은 선택(각각 46.7%)을 받았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티에스엠시(TSMC)의 전현직 직원들이 “군대 같다” “상명하복이 엄격하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와 맥이 닿아 있다.

연구개발·엔지니어 91.7% “건강 문제 경험”

회사의 노동법 준수 여부를 묻는 말에 ‘확실히 지킨다’고 답한 비율은 40%(12명)에 불과했다. ‘전혀 안 지킴’(5명), ‘거의 안 지킴’(5명)을 택한 비율이 33%에 달했다. 야오린 대만전기노조 사무국장은 “신주과학단지의 근로·산업 안전보건 감독은 노동부가 아닌 신주과학단지관리국에서 한다”며 “과학단지에만 예외를 둬서 노동을 중요시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연구개발 및 엔지니어(12명)로 대상을 좁혀보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반도체 연구개발 및 엔지니어 12명 가운데 11명(91.7%)은 ‘건강 문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는 전기/전자 업종 노동자(10명 중 5명·50%)의 두 배에 달했다. 우울·불안(83%), 심한 스트레스(67%) 응답률이 전기/전자 업종 종사자에 견줘 최대 세 배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회사의 노동법 준수 인식을 묻는 말에도 전기/전자 업종의 경우 ‘확실히 지키다’고 한 응답이 10명 중 6명이나 됐지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12명 중 2명에 그쳤다.

주관식 응답에서도 이런 흐름이 관측됐다. “법률이 최소한의 보호장치인데 지금도 하루 12시간 노동 상한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과거 TSMC에서 초과노동을 하다 버티지 못해 미국계 기업으로 이직했다. 지금은 주 20시간 정도 일한다” “초과노동에 협조하지 않아 해고됐다. 노조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등 부정적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재명 정부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메가특구특별법’을 계획하고 있다. 법안은 반도체 생산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대폭 허물고 지원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경영계의 핵심 숙원인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 등이 검토되고 있다.

만성적 과로의 위험성을 실감하고 있는 응답자 가운데 20명이 한국 정부와 경영계의 이런 시도를 두고 “더 극단적인 과로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쟁력 향상과 인재 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이는 7명에 그쳤다. 한 응답자는 “노동시간 상한 규제를 없애면 기존 직원들이 끝없이 늘어나는 생산 요구를 떠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주과학단지 안에 있는 티에스엠시(TSMC) 설립자 이름을 딴 ‘모리스 창 빌딩’.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이 대만 반도체 산업 크게 오해”

대만 노동계는 최근 과로로 인한 인재 유출 문제에 직면한 TSMC의 상황을 사례로 꼽았다. 리장훙 대만전기노조 부위원장은 “TSMC는 현재 같은 노동조건으로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구하기 힘들어진 실정”이라며 “미국·일본 기업들이 ‘일·가정 양립’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채용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하오위 대만국립정치대학 노동연구소 조교수도 “연구개발 성과에서 연구개발직의 노동시간이 핵심 요소는 아니다. 노동시간 상한을 철폐하는 정책이 실제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대만과 한국이 경쟁 관계일지 몰라도, 적어도 노동환경 측면에서 대만 엔지니어들은 한국의 제도를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우이청 교수는 설문 결과를 받아본 뒤 “대만 신주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이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며 “대만 역시 노동시간 상한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며, 법률적으로 반도체 엔지니어 직무에 예외를 두지 않는다. 대만을 ‘노동자를 쥐어짜 성공한 국가’로 보고 노동제도를 바꾸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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