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0년,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

서울여성회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북토크
2026년 8월 7일 저녁,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책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0년,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서울여성회 기획) 북토크가 진행됐다. 서울여성회와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가 공동 주최한 북토크가 시작될 때 상영된 영상 속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대구 2·28기념중앙공원에 모여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일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의 한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살해 사건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균열을 냈다.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자각은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불안과 공포를 안겼으며, “나도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각성을 가져왔다. 죽음조차 ‘화장실녀’라는 이름으로 조롱당하는 현실 앞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강남역 벽면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추모의 목소리가 모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이들이 여성폭력에 경종을 울리며 행동에 나섰다.
여성폭력은 ‘개인의 불운’이 아닌 ‘구조적 문제’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6년, 서울여성회와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부터 5월 17일 추모의 날까지를 집중 추모행동 기간으로 선포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고 캠페인을 벌였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피해자를 애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여전히 끊이지 않는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폭로하며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었다.
150개 여성·시민단체가 연대한 추모행동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전국 주요 도로 위에서 펼쳐진 ‘다이인(die-in) 퍼포먼스’였다. 참가자들은 “추모를 넘어 행동하라”는 슬로건을 온몸으로 구현하기 위해 맨땅에 드러누웠다. 3월 7일 찬 바람이 불던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된 추모행동은 부천과 수원, 춘천, 제주, 대구, 목포 등을 거쳐 5월 17일 강남역 뜨거운 아스팔트 위까지 이어졌다. 강남대로에 누운 500여 명의 참가자는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생존의 위협을 사회에 알렸다.
최근 서울여성회는 77일간의 집중 추모행동 여정을 기록하고 성평등 사회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책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0년,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을 펴냈다. 추모행동 기획단들은 전국 각지를 방문해 성평등과 젠더폭력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온 지역의 페미니스트들과 교류하였고, 대학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탈정치화에 맞서 행동해 오고 있는 대학생들과도 만났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담아 낸 것이 이 책이다.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북토크 현장에서 참여자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행동의 흔적을 살펴 보고 있다.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성폭력을 개인의 불운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고 사회적으로 공론화하였다. ⓒ일다
지난 7일 저녁, 서울여성플라자에선 책 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가 개최되었다.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윤미영 집행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1부에선 박지아 공동대표가 지난 추모행동의 여정을 돌아보았고, 2부에선 강나연 서페대연(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운영위원, 이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교수, 로리주희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침묵을 깨고 광장으로 나온 여성들, 지난 10년 일궈낸 변화
디지털 성범죄 공론화, ‘낙태죄’ 폐지, 성평등 민주주의 광장의 주역…
강남역 사건 이후 10년 동안 많은 여성들이 거리와 온라인, 그리고 제도적 영역을 넘나들며 한국 사회의 성평등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노력해 왔다. 10년의 여정 속에 거둔 큰 성과는 무엇일까?
이현재 교수는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화와 사회적 공론화”를 꼽았다. 온라인 공간에 깊이 뿌리박힌 여성혐오 구조를 폭로하고 법적 규제를 이끌어낸 것은 여성 청년들의 각성과 끊임없는 투쟁 덕분이었다고 짚었다.
더불어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투쟁 역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여성들은 단순히 ‘낙태죄 폐지’라는 사법적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개개인의 상황과 권리를 포괄하는 ‘재생산권’이라는 언어를 선언하며 성적 권리와 임신·출산의 아젠다를 새롭게 정립했다”고 말했다.
책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0년, 세상을 바꿔온 여성들』(서울여성회 기획, 디자인FINE)은 소셜 펀딩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서점에도 배포될 예정이다. ⓒ일다
박지아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공동대표는 “여성들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광장의 주역으로 활약한 점”을 언급했다. “과거 박근혜 탄핵 광장에서부터 최근 윤석열 계엄 탄핵 광장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성평등과 민주주의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평등 민주주의가 기본이어야 한다’는 걸 증명했다”고 밝혔다.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광장 문화의 성장이라고 꼽았다. 과거 광장에서 발생하던 여성 비하적 발언과 성차별적 관행에 맞서 여성들이 끊임없이 항의하고 싸워온 결과, 지난 윤석열 계엄 탄핵 광장 투쟁에서는 “주최 측이 시작 단계부터 ‘평등 안전 약속’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것.
대학과 지역 사회가 마주한 백래시와 탈정치화
그러나 변화와 진보의 이면에는 거센 저항과 장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학 캠퍼스는 현재 ‘탈정치화’와 맞물려 안티 페미니즘이라는 백래시의 최전선이 되었다. 강나연 서페대연 운영위원은 “대학 사회 내에서 페미니즘은 학내 갈등을 유발하는 금기시된 주제로 취급받으며, 갈등 자체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표백해 버리는 탈정치적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로 인해 “대학 내 교제폭력이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구조적 장벽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지역 사회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고립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해 왔다. 박지아 공동대표는 ‘보수적인 지역 분위기 속에서 여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조차 이끌어내기 어려웠던 대구의 활동가들, 그리고 섬이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피해자 한 명을 만나기 위해 하루에 단 두 번 뜨는 배편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목포 활동가들의 증언’을 소개하며, 이들이 견뎌온 10년의 무게를 전했다.
거세진 백래시를 분석하며, 이현재 교수는 한국 사회 우경화의 핵심 기제로 “물화된 정체성의 정치”를 지목했다. “기득권 사회와 백래시 세력은 가부장제적 성역할이라는 딱딱하게 굳어진 정체성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서’로 둔갑시킨 후, 이를 교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포감을 조장하여 공격한다”는 분석이다.
북토크에서 박지아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공동대표가 발표를 하고 있다. ⓒ일다
이현재 교수는 “국가가 생색내기용으로 (여성폭력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적 법안을 만드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는, 비교적 손쉬운 방식이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제도적 보완을 넘어, “성별 고정관념의 틀을 해체하고 젠더를 ‘말랑말랑하게’ 풀어내는 성평등 문화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또 10년, 성평등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하자
그렇다면 여성폭력과 성차별이 없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향후 10년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북토크에 모인 이들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국가적 성평등 추진 체계와 예산 확대다. 로리주희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성평등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의 예산이 동결되거나 축소되어 성평등 교육조차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재 교수 또한 “일회성 대책을 넘어, 지역과 학교 현장에서 장기적인 성평등 문화와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예산 편성 요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은 2026년 5월 17일, 사건이 발생했던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강남대로에서 시민 500여 명과 함께 집회를 열었고, 강남역 10번 출구는 또다시 여성들이 쓴 추모의 포스트잇으로 가득 찼다. (출처-서울여성회 페이스북 페이지)
강나연 서페대연 운영위원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황윤 감독, 2022)에 등장하는 새만금 수라갯벌의 흰발농게가 페미니스트와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죽어간다고 생각한 갯벌에서 모습을 드러낸 흰발농게. “우리 또한 흰발농게처럼 페미니스트를 고립시키려는 백래시 이데올로기에 위축되지 않고, 척박한 현실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성평등의 새로운 물길을 내는 끈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리주희 공동대표도 “여성운동의 생태계 조성”을 강조하며 “백래시에 맞서는 싸움은 장기전이기에, 활동가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일상에서 작은 성취를 서로 나누고, 함께 놀고 즐기며 행복하게 지속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지아 공동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페미니스트들이 외친 여러 구호 중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를 다시 나누고 싶다며, “연대의 감각을 일상의 실천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 예로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들며, ‘연대의 감각’을 확장하자고 말했다.
“여성폭력은 단순히 젠더 간의 갈등을 넘어,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구조적 폭력과 맞닿아 있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폭염 속에서도 쉬는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더운 나라에서 왔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말로 이주노동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10년 전 강남역에서 많은 여성들, 페미니스트들은 우연히 살아남았음을 각성한 후 발언하고 조직하고 연대하며 역사를 전진시켜 왔다. 책 『그날 강남역에서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외로운 개인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성평등이 사회 전체의 상식이 되는 ‘성평등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라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