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혁명 시대, ‘공익적 인수합병’이 필요한 이유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생산능력을 보유하면서도 저임금·저숙련 구조에 갇혀 있다. 원하청 구조와 금융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AI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최근 수년 동안 인공지능(AI) 기술은 ‘생성형 AI’를 계기로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근원적인 의문이 있다. 인간의 지능을 대체한다는 이 기술이 실제 생산성 향상과 생산능력의 고도화에 기여하는가? 미국의 거시경제 지표에서도 AI의 생산성 기여 효과는 매우 흐릿하다. 신기술 발전과 ‘생산 현장에서 신기술의 광범위한 효율적 채택’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기업의 생산조직에 효율적으로 흡수·응용되지 못하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왜 흡수·응용되지 못할까?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 때문이다. 예컨대 제조업체의 CEO가 기술 채택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이나 자본시장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고, 그 기술로 일자리를 잃을 노동자들이 반발하거나 혹은 작업장에서 로봇을 운용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신기술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생산력의 발전에 생산관계(사람들 간의 관계)가 질곡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새로운 생산력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한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AI 시대 국가가 ‘생산 플랫폼’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두어 달 동안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AI 발전 전략’에 대한 글을 연재했다. 그의 논리는 상당 부분 이재명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에도 관철됐다. 한국의 제조업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AI 전환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반도체, 데이터센터, 피지컬 AI)을 중점 육성하자는 그의 발상은 한국의 ‘AI 육성 전략’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진보적이었다. 김용범 실장에 따르면 AI는 단순한 기술혁명이 아니라 생산혁명이며, AI 시대의 국력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실제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산능력’이 결정한다. 그는 또한 국가를 기존의 시장주의 도그마(‘국가는 경제에 개입하면 안 된다’)에서 해방시키며 ‘생산 플랫폼’ 역할을 맡겼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전력과 용수 등 산업 인프라를 공급하고, 부동산과 자산시장으로 흘러가던 유동성을 팹과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같은 생산적 영역으로 돌리는 일을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준 런던대 SOAS 교수와 함께 〈쾌도난마 한국경제〉 등의 저서로 일찍이 한국 제조업의 국가경제적 중요성을 환기시켰으며 최근엔 ‘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인 정승일 박사는 김용범 실장의 문제 제기를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의 경제 담론을 지배해온 시장주의적 도그마를 벗어난 보기 드문 시도”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승일 박사는 다만 김 실장의 ‘생산능력론’에 결정적 ‘공백’이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능력이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노동자·금융기관·국가 사이의 관계(생산관계)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AI는 국가경제를 고도화할 수 있지만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수도 있다. 정승일 박사가 SNS를 통해 이런 문제 제기를 하자 김용범 실장이 화답했다. 정 박사의 문제 제기에 “AI 시대 국가는 생산관계를 조직하는 국가”라고 응답한 것이다.
AI라는 유례없는 생산력 발전의 기회에 맞춰 한국은 어떤 제도를 새로 설계할 수 있을까? 다음은 정승일 박사와의 문답이다.
정승일 박사(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부회장)는 기업·노동자·국가 간 관계 설정이 ‘AI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말했다.©시사IN 이명익
‘생산능력이 새로운 국력’이라는 김용범 정책실장의 화두에 대해 ‘생산관계’라는 필수적 요소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는데.
기술 자체는 하나의 생산요소일 뿐이다. 예컨대 로봇 같은 ‘피지컬 AI’ 여러 대를 공장에 들여놓는다고 생산능력이 발전하는가? 그렇지 않다. 전기가 공급되고, 생산 라인을 재설계해야 한다. 로봇이 고장 나면 전문 인력이 고쳐야 한다. 그런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 상당수는 로봇을 도입할 돈도 없고 엔지니어도 없다. 로봇으로 생산능력을 높이려면 그 중소기업에 자금을 투입할 투자자, 로봇을 능숙히 다루는 노동자 등이 필요하다. 즉 누가 전기를 공급하고, 투자를 결정하며, 노동할 것인지가 정해져야 한낱 생산요소일 뿐인 기술이 생산력으로 전화한다. 또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이 기여한 부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이처럼 노동자와 자본가, 기업과 투자자 등은 신기술 도입을 둘러싸고 서로 관계를 맺는데, 이를 ‘생산관계’ 혹은 ‘제도’라고 부를 수 있다. 김 실장은 생산력을 이야기했지만 생산관계는 생략했다. 노동도 기업지배구조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공백을 지적한 것이다.
AI 시대에도 노동자가 필요한가? 모두 AI로 대체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반복적인 단순 임가공 노동은 AI 로봇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AI의 오류와 한계를 파악하고 돌발 사태를 처리하며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는 인간의 능력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AI가 고도화될수록 그것과 결합하는 인간의 숙련과 판단력, 사회적 지식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는 민주당 계열 정부가 거대한 ‘공급 측 산업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민주당은 주로 분배 문제에 당력을 기울여왔다.
긍정적 변화다. 문재인 정부 당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소재·부품·장비 수출을 규제하자, 소부장 독자 개발과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을 추진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민주당 정부가 반도체,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하나의 생산체계로 묶어 대규모 투자를 조직하려 한 적은 없었다. 국제 환경의 변화도 일조한 듯하다. 과거엔 미국과 국제기구(IMF, 세계은행 등)가 국가의 산업정책을 후진적 관치경제로 금기시했다. 그런데 정작 바이든 정부에 이르러 미국은 반도체 및 친환경 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하는 등 산업정책을 강화했다. 트럼프 정부 역시 한국 기업 등의 팔을 비틀어 대미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국가, 국유은행, 지방정부와 기업을 연결·조정해서 산업정책을 추진해온 중국을 미국이 뒤늦게 따라가는 셈이다.
6월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산업정책의 원조는 개발독재 시기의 한국 아닌가.
그 산업정책을 중국이 가져가고 미국이 베끼더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부활할 수도, 부활하려 해서도 안 된다. 경제개발을 위해 반드시 독재가 필요한가. 민주정부도 장기적인 산업 목표를 세우고 금융과 인프라를 조정하며 첨단산업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개발독재가 아니라 ‘개발 민주주의’다.
AI를 생산력 발전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생산관계에 대해 논의해보자. 우선 금융과 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3대 메가프로젝트가 실현되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천문학적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최근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이 생산적 실물 투자가 아니라 부동산, 코인, 주식 유통시장(기업이 이미 발행된 주식을 거래하며 시세차익을 노리는 시장) 같은 비생산적 저수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점점 더 ‘지대추구(rentier) 자본주의’의 특성이 강해진다. 신규 설비나 인력으로 자금이 흘러야 생산능력이 축적된다. 그런데 그동안의 금융기관 규제는 해당 기관들이 부동산 담보대출을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더욱이 한국의 은행이나 증권사는 첨단 반도체나 AI 산업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마저 없다. 단타 매매 수수료나 부동산 PF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들이 산업 전문가들을 채용해서 자본이 미래 수익성이 높은 업종으로 흘러갈 수 있게 유인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주식 발행시장(1차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지금은 기업이 유상증자를 계획하면 주주들이 주식 가치가 희석된다며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보다 한국의 주주자본주의가 더욱 극단적 방향으로 치닫는다는 염려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의 본향인 미국이 AI 혁명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미국이 AI 모델(LLM)과 반도체 ‘설계’를 주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제조 능력이 없다. 애플만 해도 설계와 브랜드, 플랫폼 장악력으로 30~40%의 독과점 마진을 누리고 있으나 실제 부품 생산과 조립은 아시아 공급망에 의존한다. 그러니까 미국 빅테크들은 자사주 매입 등으로 주주의 이익을 엄청나게 높여도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업이익률이 10% 안팎인 한국이나 일본, 독일의 제조업체들이 미국 모델을 따라 하다간 망한다.
앞으로 AI 경쟁의 무게중심은 미국의 ‘AI 모델(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로드 등)’보다 점차 ‘피지컬 AI’로 이동할 공산이 크다. 피지컬 AI는 공장, 물류, 조선, 농업 등 현실의 제조 기반과 결합해야 완성된다. 제조업 기반이 없는 미국은 어렵다. 피지컬 AI 시대를 주도할 나라는 중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중국은 자동차와 배터리, 드론과 로봇, 철강과 조선, 전자산업을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했다. 국가와 지방정부, 국유은행과 민간기업이 장기 산업정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국가와 국유은행이 조율해 기업들이 첨단 기술 개발에 대규모 장기투자를 하도록 강제한다.
3월11일 중국 상하이의 애지봇 본사에서 철강 제품을 들어 올리는 로봇. ©AFP PHOTO
이것은 한국에 기회다. 얼마 전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한국에 와서 제조업체들과 연대를 모색하지 않았나. 미국엔 피지컬 AI를 실현할 제조 기반이 부족하고, 중국과의 협력엔 정치적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라는 비교우위를 살려 글로벌 AI 산업의 병목을 장악해야 한다.
이제 ‘AI 초과수익’의 배분 문제에 대해 논의해보자. 재미있는 현상은, AI 산업의 꼭대기에 있는 미국 AI 업체들(오픈AI, 앤스로픽 등)은 여전히 대규모 적자를 기록 중인데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먼저 거대한 초과이익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 거대한 수익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이 또한 회사-노동자-투자자-국가 등이 얽힌 생산관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수익 배분의 첫 순위는 ‘회사 법인’이어야 한다. 국가경제 차원에서 ‘회사라는 법인격 자체의 영속적 번영과 생존’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회사는 주주만의 것이 아니다. 주주뿐 아니라 노동자와 경영자, 채권자와 협력업체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회사를 매개로 결합해 있다. ‘회사가 지속될 것(going concern)’이라는 신뢰 아래 은행이 돈을 빌려주고, 협력업체가 납품계약을 맺으며, 노동자가 고용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이익 배분의 첫 순위는 미래 투자를 위한 사내 유보여야 한다.
두 번째는 협력업체와 산업 생태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성장한다고 반도체 생산능력이 유지되지 않는다. 소부장 업체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설비를 늘릴 자금이 없다면 대기업의 팹도 멈춘다. ‘반도체 생태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 소부장 업체들의 공동투자가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올해 삼성전자의 법인세 감면이 수십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기업 영업이익이 이처럼 폭증할 때는 세액공제를 잠정 중단하거나 그 돈이 중소기업 생태계로 흐를 수 있게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관계를 바꾸자는 말인데.
주식시장의 본래 구실 가운데 하나가 기업에 장기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기업이 성장하려면 이윤을 사내에 남겨 재투자해야 한다. 필요하면 유상증자를 통해 새로운 자본을 조달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자본시장의 목적은 주가 상승으로 제한되고 있다. 유상증자도 마음대로 못한다. 생산능력을 확대해야 할 시점에 발행시장은 위축되고, 이미 발행된 주식을 사고팔아 차익을 얻는 유통시장만 팽창하는 것이다. 사모펀드인 MBK가 장악한 홈플러스를 보라.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회사를 망가뜨리고 종업원과 채권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나. 기업은 노동자, 경영자, 채권자, 협력업체가 모인 복합적인 사회적 기구다. 특히 지금처럼 막대한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이 필요한 AI 전환기에는 장기투자가 필수적이다. 이윤의 대부분을 주주에게 돌려준다면 무슨 돈으로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겠는가. 기업과 투자자의 관계는 변해야 한다.
7월23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지수 등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넘어가보자. 대기업-중소기업 격차와 이에 따른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다. 한국의 역대 정권들이 해결하고 싶어 했지만 이루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AI 전환’이란 바람을 타고 이 문제에 대처할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흔히 대기업-중소기업 사이의 원하청 문제를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불공정거래’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그동안의 접근 방법 자체가 잘못됐다고 본다. 문제의 본질은 대기업-중소기업 간 시장거래가 아니라 ‘원청의 위장된 노동착취’에 있다.
그동안 역대 정부는 하청업체의 납품단가 보호정책을 시행해왔다. 특별한 효과는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수의 하청업체가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활용한 단순 임가공 사업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이 낮은 부문이라서 진입장벽이 낮고 이에 따라 경쟁도 치열하다. 정부가 아무리 대기업-중소기업 공정거래를 외쳐도 더 낮은 단가로 공급하겠다는 업체가 숱하기 때문에 단가 하락 압박이 계속된다.
원청 대기업은 이런 구조를 활용해서 낮은 단가로 납품받는다. 그들이 하청이라는 ‘기업 간 시장거래’의 외형을 통해 실제로 하는 일은 저임금 노동착취다. 노동착취를 시장거래로 위장한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저기술 임가공으로 경쟁하는 구조를 깨야 한다. 이에 따른 더욱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노동자 숙련 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AI 시대에 접어들어 더 심해졌다.
요즘 기업들은 신입보다 경력직을 훨씬 선호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숙련을 중시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숙련 체계가 흔들리다니?
중소기업이 전체 고용의 80% 이상을 맡고 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이 청년을 채용해서 OJT(현장 실무 교육)로 그에게 숙련을 축적시킨다. 상당한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기업이 노동자를 두 배의 임금으로 데려가버린다. 그 노동자로서는 ‘합리적’ 선택을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어떻게 되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중소기업은 신입을 채용해 훈련하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대기업은 신입을 채용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론 청년이 OJT로 숙련 노동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사라진다. 모든 경제주체가 나름 합리적으로 행위했으나 그 결과로 사회 전체의 숙련 형성 체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해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산별교섭을 통해 업종별·직무별 임금의 하한을 설정해야 한다. 임금 차이가 줄면 노동자가 훈련 직후 대기업으로 이동할 유인이 낮아진다. 중소기업은 청년들의 숙련에 투자할 수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서 훈련된 인력을 채용할 경우 ‘훈련 분담금’을 내게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실제로 대기업들은 숙련 인력 형성에 투자된 비용을 내지 않고 공짜로 혜택을 누렸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있다. 저임금을 무기로 생존해온 기업들의 도산으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안다. 그러나 AI 시대에 대응하려면 싫든 좋든 가야 하는 길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산별교섭으로 ‘저임금 경쟁’을 막아야 한다. 어차피 소부장 기업들이 피지컬 AI를 본격 도입하기 시작하면,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숙련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경쟁력이 없는 업체는 퇴출될 것이다. 그러나 저기술·저임금 노동에만 의존하는 기업을 모두 존속시키는 것은 국가경제 차원에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만 저기술·저임금 기업이 폐업하는 과정에서 쓸 만한 기술과 장비, 숙련 노동자까지 모두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경쟁력 있는 기업이 이런 인적·물적 자산을 인수해 고도화할 수 있도록 공익적 인수합병(M&A)의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7월15일 서울의 한 고용센터에서 구직자들이 상담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M&A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인데, 사모펀드 MBK의 폐해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민간 사모펀드에만 맡기면 부동산과 자산을 팔아 단기 수익을 얻는 약탈적 구조조정이 벌어질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어떤 기업을 살리고 죽일지 결정하면 관료적 비효율과 정치적 압력이 개입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으로 갈 필요는 없다. 공공(公共)이 민간 자산운용사에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해 수익성뿐 아니라 기술과 고용, 산업 생태계의 보존을 조건으로 M&A를 추진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AI 전환은 최첨단 장비 몇 대를 보급하는 사업이 아니다. 저임금 임가공 업체를 기술기업으로 고도화하고, 고도화할 수 없는 기업은 질서 있게 퇴출시키며, 그 안의 사람과 기술을 더 생산적인 조직으로 이동시키는 산업 재편이다. 구조조정과 사회보장, 직업훈련을 하나의 정책으로 묶어내야 한다.
생산관계의 재조직에 따른 거대한 구조조정엔 거센 반발이 불가피할 것이다.
AI 전환의 위험과 비용을 부담하는 계층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회보험의 누진성을 강화해야 한다. AI 전환으로 인한 고소득자가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에 더 많이 기여하도록 보험료 상한과 체계를 조정해야 한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거나 청년의 노동시장 진입을 막을 경우, 실업과 전환 비용을 견딜 수 있게 고용보험의 보장 수준도 높여야 한다. 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력과 용수, 토지와 인허가를 제공해 지역에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를 조성하고 보조금까지 지급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공공이 해당 업체에 대해 그 금액만큼의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발전소나 통신망과 유사한 공공 네트워크다. 공공이 인프라를 제공하는데 민간 대기업에게 경영권과 수익을 독점시키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첨단산업의 초과이익 혹은 초과세수 일부를 재원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 기금을 중소기업의 AI 전환, 공동 직업훈련, 실직자와 청년의 생계 보장에 사용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재분배가 아니다. 첨단 부문의 잉여를 산업 생태계 하부의 숙련과 생산능력 형성으로 다시 연결하는 생산관계의 재설계다.
‘생산관계의 재설계’란 용어를 사용하셨다. 뭔가 엄청난 것 같은데 모호하다. 한국의 상황에 맞춰 정리해주면 좋겠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생산능력을 유지하면서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빠르게 이식되는 특이한 나라다. 대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놀지만 중소기업과 노동시장은 저임금·저숙련 구조에 갇혀 있다. 이제 AI라는 새로운 생산력이 이 모순들을 더욱 격화할 것이다. AI는 단순 반복 노동을 줄이는 동시에 더 높은 숙련과 판단력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의 원하청 구조와 이중 노동시장, 금융 시스템은 그 숙련과 장기투자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AI라는 생산력의 발전에 낡은 생산관계가 질곡으로 작용한다.
생산관계는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가 의식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주주환원보다 재투자를 우선하는 기업지배구조, 자금을 생산으로 보내는 금융 시스템, 업종별 임금체계와 공동 직업훈련, 초과수익의 사회적 환류 장치를 함께 조직해야 한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생산능력이 새로운 국력”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 동의한다. 다만 한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 “생산능력을 가장 잘 조직하는 생산관계가 새로운 국력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다.” AI 시대의 한국이 성공하려면 새로운 공장 건설뿐 아니라 그 공장을 움직이고 통제하며 성과를 나누는 사회적 관계까지 다시 지어야 한다.